누구라도

나는 박원순을 오래도록 지지하던 사람이었다. 막 엄청 열정적 열성 지지자였냐면 그렇진 않았지만, 내는 책을 몇 권 사 읽고, 관련 기사가 나면 응원하는 마음으로 챙겨 읽고, 그의 활동을 존경하며, 누가 그를 조롱하기라도 하면 정색하고 멈출 만큼은 되었다. 그의 자살이 드러난 날, 그가 성추행을 했을 것임은 누구라도 추론할 수 있다. 그 외의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시나리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명이거나 무고라면 자살할 이유가 없다. ‘자살했으니 백퍼센트 성추행을 했다’ 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추행을 한 게 사실이라는 걸 추론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나는 ‘그가 그랬을 리가 없어’ 라는 생각같은 건 평소에도 누구를 상대로도 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추론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생각했다. 세상 누구라도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잘못이나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다. 마초적이거나, 권위적이거나, 보수적이거나, 성평등의식이나 젠더문제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어야만 죄를 짓는 게 아니다. 정치적 대의는 올바랐을지 몰라도 운동권들도 성범죄는 많이 저질렀고 내부에서 폭력, 가스라이팅, 강요 등의 행동들을 했었다. 링컨도 부정선거 했었고, 황희정승도 뇌물을 받았다. 그 어떤 업적으로 인정받는 이들이라도 동시에 다른 면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은 인류역사에 널리고 널렸다. ‘그 사람은 그럴 리가 없어’ 라는 믿음은 항상 ‘누구라도 예상외의 행동을 할 수 있어’로 바꿔야 한다. 다만 그럴 행동을 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는 사람과,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걸 또 구별 안 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괜히 쫄아 살거나 편집증적 태도를 갖게 된다. 가능성의 높낮이는 존재한다.)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없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이 아닌 다음에야.

내 배우자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부모님도 내가 상상치 못했던 잘못을 할 수 있다. 내 자식 또한 가해자나 범죄자가 될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건 아니다. 무슨 일이든 발생할 수 있다. 다만 여태까지 보아온 삶의 궤적과 물질적 사회적 환경과 이런 저런 상호작용을 토대로 그 가능성이 높냐 낮냐를 가늠하며, 그에 맞춰 신뢰하며 사는 것이다. 그 낮은 가능성을 어떻게 예방할지 가끔 생각하고, 그 낮은 가능성이 실현됐을 때는 어떻게 대처할지를 가끔 생각하면서.

내겐 정의당 당대표가 성추행을 했다고 해서 딱히 놀라울 건 없었다. 보수당 당대표가 하면 ‘쯧쯧 그럴 줄 알았다’ 이고, 정의당 당대표가 하면 ‘그럴 수가’ 인가? 진보막말러도 무수히 보고, 진보라면서 젠더의식 1도 없고 자유주의의 개념이 완전 실종된 사람들도 무수히 본다. 정치인이라고, 선출됐다고 해서 딱히 다를 바 없는 사람들도 이미 많이 존재한다. 개인에게라면 그래도 그간 그럴 리가 없는 행보를 보여와서 가능성 낮다고 믿을 여지나 있다고 치자. ‘내가 지지하는 당’ 혹은 ‘세력’에 이르면 이건 개인적으로 관찰할 수 없는 수십수백명의 집단이라서, 그들이 죄를 짓지 않으리란 믿음 자체가 아예 성립할 수 없다. 죄 짓지 말고 일 잘 해주길 바라는 기대가 있을 수 있고, 여태까지 해온 바를 토대로 그 기대를 어느 정도 채워주리라 예상할 순 있지만, 무슨 사안에 대해서든 ‘그럴 리 없다’고 말할만한 믿음이 존재할 수가 없다.

이번 사건으로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 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종류의 글들이 언론칼럼 등지에 올라오는 걸 보면서...

당연한 말이지, 당연한 건데.

박원순, 오거돈, 김종철을 거치고서야 사회적으로 환기되는 때가 오는구나....

하긴 생각해보면 우리편 정치세력이 무오류라고 믿는 사람도 무더기인 마당에 갈 길이 멀긴 하다.

덧글

  • 넥판 2021/02/02 19:26 # 답글

    당연한 건데...참 그렇죠

    과연 시대는 불행 없이는 넘을 수 없는 것인가 라는 물음이 절절하게 와닿습니다
  • 히요 2021/02/05 17:06 #

    당연하다고 여긴 게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걸 이런 때에 새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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