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 보이는 김에 유시민에 대한 생각

아주 예전에는 꽤 좋아했다. 부산에 강연하러 왔을 때 들떠서 찾아갔는데, 그 강연에서 실망했다. FTA관련 강연이었다. 언론에서건 책에서건 주요하게 다뤄지던 우려와 문제점에 대해서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FTA의 긍정적인 면만 밝게 강조했다. 내가 예상하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문제점과 우려에 대한 인식도 있음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해줄 줄 알았다. 그냥 FTA광고홍보용 강연에 가까웠다. 그때부터 정치인으로서는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책은, 글은 잘 쓰니까, 정치 외적인 영역에서는 여전히 읽고 들을 만한 말들을 하니까 그런 점은 좋았다. 그게 깨져나간 것은 표지가 뽀얀 책에서, 그가 의미없는 라떼를 읊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였다. 이미 수없이 말하고 알려져서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과거의 영웅담을 같은 맥락으로 되풀이하며 자기자랑을 할 때, 과거의 정당성을 연장하려 할 때, 이제 통찰력에 대해서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지식은 사라지는 게 아니니 지식으로 풀어놓는 영역은 괜찮겠지, 그 기대는 ‘역사의 역사’에서 깨졌다. 재미있는 책이고 틀린 말은 없겠으나 깊이 없는 얄팍한 책이었다. 본인이 아는 걸 그냥 재탕할 뿐인 책. 정치에서도, 통찰력에서도, 지식에서도 이제 더 이상 볼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을 때쯤, 그는 혹세무민이 뭔지 몸소 보여주었다. 과거에 그에 대해 좋게 말하고 그의 책을 사서 읽었다고 언급한 내 모든 기록들이 부끄러워지고 삭제하고 싶었던 게 그 무렵이다. 그 후로는 그냥 잊어버렸다. 뭘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러다 뉴스를 봤다. (기사) [ 2019년 12월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에 출연해 “검찰이 노무현재단 은행 계좌를 들여다본 것을 확인했다. 제 개인 계좌도 다 들여다봤을 것으로 짐작한다”며 “내 뒷조사를 한 게 아닌가 싶다. 제 처의 계좌도 다 들여다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난해 7월 라디오 인터뷰에서는 사찰 의혹의 주인공을 “윤석열 검찰총장이나 한동훈 당시 반부패강력부장”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 는데, [ “누구나 의혹을 제기할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할 경우 입증할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저는 제기한 의혹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 의혹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며 사과했다. 유 이사장은 “사실이 아닌 의혹 제기로 검찰이 저를 사찰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 점에 대해 검찰의 모든 관계자들께 정중하게 사과드린다. 사과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형태의 책임 추궁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노무현재단 회원들을 향해서도 “입증하지 못할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노무현재단을 정치적 대결의 소용돌이에 끌어들였다”며 “용서를 청한다”고 밝혔다. 유 이사장은 “저는 비평의 한계를 벗어나 정치적 다툼의 당사자처럼 행동했다. 대립하는 상대방을 ‘악마화’했고 공직자인 검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불신했다”면서 “누구와도 책임을 나눌 수 없고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많이 부끄럽다. 정치 현안에 대한 비평은 앞으로도 일절 하지 않겠다”고 했다. ] 는 내용이다.

나는 그가 몰라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유시민이 똑똑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정말 저렇게 말했을 때의 효과를 몰랐을만큼 멍청하고 생각이 짧았을까? 아니면 알고도 정치적 효과를 위해서 했고, 윤석열/한동훈 등을 쳐내면서 권력을 통해 무마할 수 있을만하다고 계산했는데, 뒷일이 생각대로 잘 안 풀려 예상치 못하게 책임져야 할 순간을 맞닥뜨린 것일까? 보통 지지자들과 팬덤은 자기 최애가 이익을 위해 고의로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느니 ‘잘 모르고 실수’ 했다고 두둔하기를 좋아한다. 아이돌 팬덤에서 병크가 터질 때마다 빠짐없이 보던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 유시민이 멍청하면 누가 똑똑하단 말인가. (사과문에서도 논리적 명확성과 똑똑한 글재주가 가감없이 보인다.) 나는 그가 똑똑하단 사실을 여전히 믿어의심치 않고, 알고도 혹세무민 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똑똑함은 도구일 뿐으로, 이것은 ‘논리는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낳지 않는다’는 당연한 명제를 거드는 사례이다.

덧글

  • ... 2021/01/23 22:28 # 삭제 답글

    저한테는 히요님 글이 사이다 같습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딱 제 맘입니다.
    추천이 있다면 백만개 날리고 싶습니다.
    늘 건강 조심하십시요.
  • 히요 2021/01/24 22:08 #

    댓글 달린 거 보고 약간 긴장했는데 읽고 안심했습니다. 감사해요.
  • 2021/01/24 21:4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1/01/24 22:1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21/01/25 01:2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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