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유보

일전에 유명인 모씨가 성추행을 했다는 미투가 나왔다는 뉴스가 떴다. 그런 주장은 사실인 경우도 있고 허위인 경우도 있는지라 나는 그런 상황에선 판단하지 않는다. 당장 뭐 해야 할 것도 아니고, 상호 의견 나오고 증언 나오고 하면 밝혀질텐데 첫소식 뜨자마자 궁예파티 벌여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그러나 주변은 이미 '모씨 좋게 봤는데 나쁜 놈이었네' 하며 난리였다. 나에게도 동의를 구하길래, 아직 한쪽의 주장이니까 좀 진행돼봐야 알지 않겠냐고 했더니, 나를 '모씨는 안 했고 무고를 당했다' 라고 주장하는 쪽으로 멋대로 집어넣었다. 나중에 그 모씨의 성추행이 사실로 밝혀지고 본인이 시인했을 때, 나한테 와서는 '쟤가 안 했을 거라고 했었죠? 봐요 내 말이 맞잖아요' 라는 것이다....... 내가 언제 그 사람이 안 했을 거랬냐고. 쌍방의 의견이 나오고 일이 진행돼야 진위를 알거랬지.

그런 일은 아주 흔하게 겪는다. 어떤 난리날 소식이 뜨고, 나는 한쪽의 의견만 들었거나 사태가 너무 초기면 판단을 유보한다. 이게 꼭 신중하고 공정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바보가 아니면 학습을 하기 때문인데, 한쪽 말 믿고 나불댔다가 밝혀지는 사실따라 말바꾸는 바보짓은 한두번 해봤으면 다신 하기 싫지 않겠냐, 뭐 그런 차원이다. 그래서 판단을 유보하면,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들은 나를 반대편으로 생각한다. 유죄다! 라고 이미 판단 끝난 사람들은 '아직 더 나와봐야 알지 않을까요' 인 나를 '무죄다!' 쪽 주장자인 것으로만 판단한다. 환장.

나는 내 자신이 상당히 강도높은 성추행 범죄의 피해자고, 내 가까운 지인이 무고로 자살할 뻔한 피해자인지라, 어느 사건이든 한쪽만의 주장이면 그것이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양쪽의 주장이 대립되는 경우에도 나는 편을 들지 못한다. 고발하는 죄목이 진짜면 고발자가 피해자이지만 그 고발 자체가 가짜면 상대가 무고 피해자인 게 아닌가. 여기엔 성별이 문제가 아니고 누가 죄 없이 고통받느냐의 문제가 있다. 그걸 무고라고 쉽게 믿고 비난했다가 무고가 아니면 어쩔 것이고, 진짜 가해자라 믿고 비난했다가 무고면 어쩔 것인가. 법원이 만능 해결사가 아니기는 해도 인민 재판보다는 나은 기관이기에 나는 나나 보통 사람들이 인민 재판을 하느니 법원의 결과대로 정리되는 걸 선호한다. 물론 법원이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내면 (대중들이 감정적으로 원치 않는 결과 말고, 구시대적 편견에 의거한 판단) 비판을 해야겠지만, 둘 중 하나를 궁예로 점찍고 비난하는 여론보다는 대체적으로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와중에 비슷한 사안을 두고 남자들과 대화를 하면, 남자들은 논란이 있는 사안에서 무고로 당할 가능성을 먼저 걱정한다. 그야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다고 가정하면 죄없이 무고 당할 상황부터 떠오를 순 있긴 한데.... 얘기하다보면 상대가 무고를 했다고 이미 확정이 된 양 어떡하냐고 걱정하고 있다. 아니, 저 고발이 무고가 아니라 진짜 피해에 대한 고발이면 어쩌려고?

반대로 여자들과 대화하다보면 세상에 무고란 존재하지도 않고 무고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2차 가해라도 되는 것처럼 전적으로 저것은 진짜 고발이며 상대는 백프로 악당인 가해자라는 전제 하에 이야기가 진행된다. 만약 무고면 어쩌려고?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아주 많은 사안도, 하나로 입장을 정하면 어떻게든 끼워맞출 수 있다. 평소에 입에 팩트를 달고 살던 사람도 팩트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당연한 거 아니냐' 며 개연성으로 메꾼다. 자기가 그 사건에서 감정이입할 수 있는 부분이 곧 그 사건의 실체이기라도 한 양 편을 고르고, 자신이 공격하는 쪽이 가해자라고 믿는다. 그래서 아니면 어쩔 건데? 아니면 말고인가. 어차피 드러날 것 없는 대중 속 한 명이니까? 그런 말들에도 진짜 피해자는, 그것이 성추행 피해자든 무고 피해자든 진짜 피해자는 자살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다행히 현실에선 다들 사회생활과 처세술을 아는 연령대라 별 일 없지만, 인터넷에서는 이런 반응도 흔하다. 무고라고 전제하는 남자들에게 무고가 아닐 경우에 대해서 얘기하면 어떤 이들은 내가 메갈이 아닌지 의심하고, 무고일 가능성을 일축해버리는 여자들에게 무고일 수 있지 않냐고 하면 그들에게 나는 흉자 명자이다. 그런 일들도 한두 번만 겪으면 족히 학습하기 때문에, 이젠 굳이 말하지도 않는다. 뭐하러 한쪽에서 메갈소리 듣고 한쪽에서 흉자소리 들어. 그냥 각자 궁예 판결 하게 놔두지. 내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