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서 Real Situation

자소서 시즌이라 또 몇 명 봐주고 있다. 돈 받고 봐주는 거 아니라서 마음이 편하고 일이 간단한 반면, 스펙이 없는 학생들이라 쓸 내용이 없고 거의 내가 창작을 하고 있어서 이건 좀 찝찝하다.

상위권이든 중하위권이든 자소서를 써오라고 하면 학생들이 가져오는 건 하나같이 초딩 일기 수준이다. 차이점이라면 상위권은 어필할 게 많고 중하위권은 그게 없다는 것 뿐. 갈등과 협력 사례를 쓰라는데 조별과제 하다가 친구랑 싸워서 절교한 얘기를 쓰질 않나 배려한 얘기를 쓰라는데 친구숙제 도와준 얘길 쓰질 않나. 문장도 딱 초딩 일기다. "무서운 선생님 수업이라 숙제를 꼭 해가야 했는데 친구가 못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가 혼나지 않게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수업 시간 시작하기 전에 끝낼 수 있었습니다." -_- 이걸 읽고 심사하는 교수가 너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가치를 파악하고 뽑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겠느냐, 하고 물으면 그런 관점은 생각한 적도 없고 말해줘도 생각할 줄 모른다. 그야 평생 신경써본 적 없는 것을 갑자기 하라니 안 되는 게 당연하지. 문제해결, 갈등해결, 협력, 배려, 공동체 가치에 관한 경험을 교육기관(학교)에서 해본 적도 없고 장려받은 적도 없고 그런 미덕을 키우거나 겪고 감동한 적도 없는데 자소서에서는 구체적인 경험을 곁들여 저런 특성을 어필해야 한다. 특히 지원동기 파트가 최고인데, 학생들 다수가 아무 생각없이 진실을 써온다. "원래는 ㅇㅇ과를 가려고 했는데 성적이 안 되고 ㅇㅇ과목이 성적이 괜찮아서 선생님께서 ㅇㅇ과로 가보는게 어떠냐고 하셔서 지원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 슬퍼. 리얼리즘 쩌는 현실 에세이를 쓰면 안 돼요. 그렇게 쓰면 안 되고 원래 꿈꾸던 직업과 관련있는 학과라 예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경우에도 그렇게만 써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에피소드와, 나름 호기심을 갖고 노력한 이야기를 곁들여서, 그 학과에 가면 이런 이런 걸 꼭 배우고 싶었다고 아주 연결성있게 이야기를 짜내야 한다. 이게 되는 학생은, 당연한 말이지만, 없다. 심지어 진짜로 어릴 때부터 꿈꾸던 직업과 관련된 학과고 그래서 해온 관련활동이 많은 학생도 그걸 그렇게 쓰진 못한다. 그렇게 써야 한다는 발상에 도달하기도 어렵고, 발상을 한다 하더라도 글로 써내는 건 또다른 차원의 재능이다. 진짜 수학과학 영재들이 실제로 드라마틱한 인생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도 써내지 못한다. 내가 이런 종류의 한탄을 하자 친구가 학생들이 학교에서 에세이 안 쓰냐고 물어봤다. 아 신선한 질문. 이런 신선한 질문은 이 친구가 미국인이라서 나오는 질문이다. 한국 학교에서 에세이를 써야 할 일은 없다고 할 수 있죠! 점수화되는 거의 모든 것이 객관식이거나 채점기준이 명확한 정보전달식 한문단/문장쓰기 수준의 수행평가와 서술형시험(서술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유형)들 뿐. 본인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길게 서술해야하는 글을, 글쓰는 훈련이 될 정도로 해야하는 일은 전혀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니 표절이 수두룩 빽빽한 것이고, 컨설팅이 많고, 대체로 학교샘들이 봐주느라 고생을 하고, 스스로 쓰면 일기 수준의 아무말대잔치를 그냥 제출한다. 글은 오래도록 다양하게 꾸준히 목적을가지고 써야 느는데 그럴 일이 평생 없고, 갑자기 자소서를 쓰라고 하니 인생에서 써 본 마지막 글쓰기 유형 (=초딩일기) 을 반복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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