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

부모님은 새해 첫날이 되면 새로 얻은 달력을 한 장 한 장 펼치며 가족대소사 날짜를 써넣는다. 누구 생일, 추석 등. 할머니 생신은 매년 추석과 가까운 날짜에 있고, 평일에 직장인이 시골에 쉽게 올라갈 수 없으니 주로 추석에 뵐 때 생신선물까지 같이 드린다.

그건 아버지께서 ‘언제가 할머니 생신이시니까 용돈이나 이것 저것 더 챙겨야 한다’ 고 형제들에게 말하기 때문에 이뤄지는 일로서, 아버지께서 말하지 않으면 작은아버지들은 먼저 챙기거나 생각하는 일이 없다.

올해에는 할머니 생신이 일요일이라 따로이 뵈러 갈 수 있다고 아버지께서 추석 때 할머니 생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고, 작은아버지들이 떠올릴 리는 만무하고, 생신을 축하하는 의미의 별도의 선물이나 용돈이나 인사같은 것 없이 추석만 치르고 다들 내려왔다.

내일 생신을 앞두고 아버지께서 작은아버지1에게 전화를 하셨다. 내일 어머니 생신이라 가려는데 하고 말을 꺼내자 작은아버지1 대답하기를 어제아레 갔는데 뭐하러 또가느냐. 우리 부모님은 그 말에 할 말을 잃으신다.

일년에 한번인 어머니 생신이고 모처럼 일요일이라 갈 수도 있는데, 열흘 전에 다녀왔다고 갈 필요 없다고 한단 말이지. 그럴거면 추석 때 생신선물까지 챙기든가. 어머니에 대한 관심 하고는.

그러나 강제로 가자고 하지 않는 타입인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냥 그러냐고 넘어가고,“선물로 케익이나 아니면 담배 한 보루 살까 생각중이다.” 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건 누가 어느 것을 사겠느냐, 분담을 제안하는 말씀이다. 가지 못해도, 선물은 골고루 돈을 보태어 해왔으니.

그러나 작은아버지1, 아무 생각 없는 듯 쾌활하게, “그럼 잘 다녀오시오.”

.... 효도가 무엇이오 가족이 무엇이오 내사 관심일랑 저 하늘의 나빌레라.

작은아버지1이 워낙 어릴 때부터 망나니여서 (그래서 나도 아주 어린 나이에 저분 인간됨이 영 아니라는 걸 일찍 눈치챘을 정도 -_-) 그렇다 치고, 작은아버지2에게 전화. 이 분의 관심도 저 하늘의 나비다. 팔랑 팔랑... 어쨌든 안 간단다. 선물? 아무 생각 없다. “그럼 잘 다녀오시오.”

결국 할머니 생신을 맞이하야 부모님께서는 케익을 사고 음식을 챙기고 용돈도 준비하고 이것 저것 준비하여 시골에 할머니를 뵈러 가신다. 작은아버지1도 작은아버지2도, 힘들 때 도와달란 소리만 잘 하고, 도움을 뼛골까지 빼먹고나면 자기밖에 모르는 타입으로 변한다. 물론 그 가족들도 다 거기서 거기.

덕분에 유용한 반면교사 삼고 있다. 부모님따라 새해 달력을 받으면, 지금은 내가 챙겨야 할 친척은 없지만 친구, 가족 생일 등 챙길날부터 적어넣는 습관 정도는 물려받았다. 작은아버지1, 2 같은 사람은 되지말자 싶어서.

by 히요 | 2007/10/06 21:49 | Real Situation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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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nippang at 2007/10/06 22:22
한동안 집에 못갈 때 아버지 생신이나 어머니 기일쯤 되면 속이 쓰리고 그랬어요. 경제적인 상황이나 여러가지 이유로 지금도 집에 잘 못가고 기념일을 잘 챙기지 못하는데, 포스팅을 읽고 많이 반성중. 외려 아버지와 동생들, 친구들이 생일이니 명절이니 저와 체와를 챙겨주는 걸 받아먹는 걸 떠올리면 아아, 우리집 망나니는 저. orz
Commented by 히요 at 2007/10/06 22:44
nippang님 // 마음은 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못하는 것이, 망나니같은 짓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Commented by 「피닉스™」 at 2007/10/06 23:44
오호. 그래도 내려가는게 어디에요.-_- 저희 둘째 큰아버지식구는 할부지 돌아가시자 마자 둘째 큰아버지만 달랑내려와서 시골살림에 그나마 있는 농작물. 뭐 마늘이나 포도 이런거 다른 친인척들 챙기는 큰어머니 옆에 와서 자기도 달라고. 하나라도 빠지면 장난아니게 삐지는 양반입니다. 욕심이 지나친 분이라 누구 잘되는 꼴 못보시는 분인데....세상은 공평한지 자식농사하나는 제대로 망치셨죠..-_-;;;;;
Commented by 히요 at 2007/10/06 23:56
...우리 부모님 말고는 아무도 안 내려갑니다만..?

세상에 빌어먹을 친척들이 많다는 이야긴 숱하게 들어서 알고 있긴 한데, 그 사람들이 다 딴나라 별세계 사람들도 아닐텐데 평소에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더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욕을 먹어야겠지요.
Commented by Apocalipse at 2007/10/07 00:42
...다른 분 집안의 어른이긴 하지만..그야말로 나빌레라..ㅇ<-<
Commented by 히요 at 2007/10/07 00:43
Apocalipse님 // 오죽하면 저희 부모님께서 '너는 저러지 말아라' 며 가르치겠습니까 (...)
Commented by 이루 at 2007/10/07 19:57
어느 집안이나 그런 분들이 계시는군요(...) 저도 큰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를 배웁니다;;
Commented by 히요 at 2007/10/08 00:14
이루님 // 이상한 친척 어르신들 얘길 매우 자주 전해들을 수 있는데요, 그분들이 좋은 부모로서 가족애나 도리를 가르칠 확률도 그다지 높을 수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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