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7월 11일
'비판'과 '악습옹호'의 자웅동체.
이 글을 읽고 마지막에 스치듯 나온 질문에 영감을 얻어 개념없음님께서 쓰신 이 글을 읽고 자극받아 쓰는 글.
질문 : 온라인의 수많은 사회에 대한 비판들을 보면 세상은 바뀌었어도 한참 전에 바뀌었어야 할텐데 왜 그대로인가.
나의 대답 :
각자 자신이 주목하는 바로 그 부분만 바뀌길 바라며 비판하지, 다른 부분에 있어선 여전히 기득권자이자 악습의 전달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여섯 명의 사례.
부모로부터 잘못된 방식의 강요를 당해온 사람 A씨는 부모는 이래선 안 된다 부모는 저래야 한다고 비판적인 의식을 한껏 키워갔지만, 결혼 후 아내에게는 무지하게 가부장적이고 가사일을 동등히 나누려하지 않고 귀차니즘으로 대충 피해가며 암묵적으로 아내에게 일을 떠넘기는 식으로 행동한다. 블로그에서 글을 쓰거나 밖에서 이야기를 할 때, 잘못된 부모의 권력에 대해서는 참으로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지만, 바람직한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아서, 기득권을 고수하고 암묵적인 무임승차자로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도 않고 남에게 알리지도 않는다.
바람직하지 못한 친구관계로 고통을 당한 사람 B씨는 우정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매우 깊은 고찰을 보여주고 사랑과 우정이 넘치되 비리와 인맥으로 얼룩지지 않는 관계를 성립하자는 탁월한 주장을 하고 실제로도 실천한다. 그러나 이 B씨는 자신의 직업에 있어서는 게으르고, 빠질 궁리만 하고, 남에게 은근히 일이 넘어가도 미안해하지 않고, 직장 동료는 친구관계가 아니라 경쟁관계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별개로 여긴다. B씨는 친구관계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사고관을 가졌을지 몰라도, 직업관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나 그것을 부러 말하지도 않기 때문에 뒤로 욕만 먹고 만다.
투명한 사회질서와 직업의식을 지닌 C씨는 귀차니스트와 게으름뱅이, 잔머리꾼과 상사에 아첨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 부당함을 절실히 느끼고 올바른 직업관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해보면 정말로 성실하고 신의어린 직업관을 가진 사람이다. 상사가 잘못된 것을 시키면 딱부러지게 의문을 표하고, 동료가 죄없이 당한다 싶으면 도와 줄 수 없다면 최소한 나중에 술이라도 한 잔 사주고 위로하며 직장생활의 합리성을 위해 노력한다. 반면 이 C씨는 동생에게 형 말은 들어야 되는 거라고 설파하며 자기 잔심부름을 전부 시키고, 말 안 들으면 때리고, 대학시절 학교에서 총학생회장을 뽑을 적에는 술사준 선배의 충고에 따라 뽑았고, 앞으로 있을 총선이나 대선에서도 그런 식으로 표를 행사한다.
올바른 공교육이 어때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D씨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노동3권 및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 학생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근현대사의 굴곡에 대해서나 정치권력에 대한 경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며 단순암기식 수업을 넘어선 철학적 사고력의 중요성에 관심이 많다. 매너리즘에 빠진 다른 교사들에 대해 실망하며 좀더 나은 교육을 고민하는 진보적 교사이다. 반면 자신의 자식은 그래도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을 나와 정장을 입고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바로 이런 바램이 학부모들 사이에 만연해 공교육을 흔드는 주된 요인이 되며, 노동자의 지위를 더 낮추는 관념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
사회비판적인 블로그 포스트를 볼 때마다 맞다고 맞장구치고 트랙백도 걸고 그 논리를 재삼 설파하기도 하는 E씨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주장들이 서로 모순으로 상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고3 수험생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극악한 경쟁관계의 교실풍경을 조장하는 내신강화정책이 나쁘다는 주장에 한껏 동조해 자신도 그렇게 설파해놓고도, 공교육을 살리고 사교육을 줄여야 하며, 어린 학생들을 입시지옥에 빠지지 않게 해야 된다고도 주장한다. (←내신강화가 바로 이 역할을 한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제 몫을 못받는다며 평준화를 반대해놓고 중학교 공교육을 입시로부터 구해낸 것이 바로 그 평준화라는 것을 모른다든가. 뭔가 ‘좋아보이는’ 주장, 뭔가 ‘나빠보이는’ 사회제도 비판을 겉만 답습하고 그 내부의 과정을 추적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방향성 없는 비판만의 비판을 매번 반복하고 있다.
사회비판적인 글을 찾아읽고 공감하며 자신의 인식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F씨는 이 나라의 언론이 정말 문제라는 포스트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언론권력을 비판한다. 그러나 자신은 넷상에 올라온 일반 시민들을 조롱하는 ucc나 짤방 등을 찾아다니고 보고 폭소하며 그들의 신상정보가 돌아다니는 걸 확인하고, 자신을 괴롭힌 사람은 단박에 신상정보를 공개해버리면 DC가 알아서 해준다고 대놓고 말한다. 맘에 들지 않는 사회제도나 마음에 들지 않는 회사의 서비스 등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고 개선을 요구하지만,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다 이렇게 사는 거지' 라고 답한다. F씨 처럼 사회적 틀에서의 개선과 개인차원에서의 실천이 전혀 닿아있지 않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런 식이다. 한 사람이 한 분야에서 부당함을 느껴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며 좀 더 바람직한 무언가를 주장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지만, 바로 다음 분야에서 나몰라라 하고 기득권을 누리거나 아무 생각없이 잘못된 관습을 따르고 있다.
사회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이 100명 있다면, 그 중 일부는 F씨처럼 실천적 차원에서는 유리된 생활을 할테고, 일부는 E씨처럼 구체적인 과정상의 문제를 탐구하지 않고 겉표면만을 비판하고 있을테고, 일부는 D씨처럼 사회에 대해서는 올바른 주장을 하면서 자기 개인사적 이익에 대해서는 포기할 수 없을테고, 일부는 A, B, C씨처럼 한 영역에서는 더없이 진보적인데 다른 영역에서는 더없이 기득권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일부만이, 사회적-개인적 차원 모두에서, 주장의 겉표면만이 아닌 깊숙한 부분까지, 또 한 영역만이 아닌 다른 영역에까지, 그 사고를 일관성있게 구축하고 또 재구축하며 사회를 개선하려 노력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1%는 커녕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게 된다.
+
사회의 발전과 개선, 진전은 이런 1%도 안 되는 일관성있는 비판자들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이고 남존여비를 믿은 사람들도 독립운동을 했고, 또한 여자를 성적으로 이용해 먹던 사람도 학생운동을 잘 하기도 했다. 집안에서 아내와 자식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가장의 말만 받들게 하면서 가열찬 언론비판운동에 뛰어들어 아주 현명한 주장을 하고 큰 기여를 하던 사람도 봤다. 사회복지단체에서 봉사적으로 활동하면서 자기가 직업상 맡은 임무는 다 펑크내는 사람도 봤다. 그러나 이 사람 때문에 그 사회복지단체는 활기를 찾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반쪽짜리 활동가도 사회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런 반쪽 비판자라도 늘어날수록 좋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자신이 그런 반쪽짜리 비판자가 아닌지, 다른 영역에서의 악습옹호자가 아닌지 각자가 스스로 반성해보면 좋겠다. 반쪽짜리가 아닌, 일관성있고 실천적 차원에서의 비판자가 늘어날수록, 사회의 개혁도 조금이라도 더 잘 풀릴테니까. 왜 비판자는 많은데 개선은 그렇게 빨리 되지 못하는가, 그 안타까운 괴리도 조금은 줄일 수 있을테고.
질문 : 온라인의 수많은 사회에 대한 비판들을 보면 세상은 바뀌었어도 한참 전에 바뀌었어야 할텐데 왜 그대로인가.
나의 대답 :
각자 자신이 주목하는 바로 그 부분만 바뀌길 바라며 비판하지, 다른 부분에 있어선 여전히 기득권자이자 악습의 전달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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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명의 사례.
부모로부터 잘못된 방식의 강요를 당해온 사람 A씨는 부모는 이래선 안 된다 부모는 저래야 한다고 비판적인 의식을 한껏 키워갔지만, 결혼 후 아내에게는 무지하게 가부장적이고 가사일을 동등히 나누려하지 않고 귀차니즘으로 대충 피해가며 암묵적으로 아내에게 일을 떠넘기는 식으로 행동한다. 블로그에서 글을 쓰거나 밖에서 이야기를 할 때, 잘못된 부모의 권력에 대해서는 참으로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지만, 바람직한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아서, 기득권을 고수하고 암묵적인 무임승차자로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도 않고 남에게 알리지도 않는다.
바람직하지 못한 친구관계로 고통을 당한 사람 B씨는 우정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매우 깊은 고찰을 보여주고 사랑과 우정이 넘치되 비리와 인맥으로 얼룩지지 않는 관계를 성립하자는 탁월한 주장을 하고 실제로도 실천한다. 그러나 이 B씨는 자신의 직업에 있어서는 게으르고, 빠질 궁리만 하고, 남에게 은근히 일이 넘어가도 미안해하지 않고, 직장 동료는 친구관계가 아니라 경쟁관계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별개로 여긴다. B씨는 친구관계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사고관을 가졌을지 몰라도, 직업관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나 그것을 부러 말하지도 않기 때문에 뒤로 욕만 먹고 만다.
투명한 사회질서와 직업의식을 지닌 C씨는 귀차니스트와 게으름뱅이, 잔머리꾼과 상사에 아첨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 부당함을 절실히 느끼고 올바른 직업관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해보면 정말로 성실하고 신의어린 직업관을 가진 사람이다. 상사가 잘못된 것을 시키면 딱부러지게 의문을 표하고, 동료가 죄없이 당한다 싶으면 도와 줄 수 없다면 최소한 나중에 술이라도 한 잔 사주고 위로하며 직장생활의 합리성을 위해 노력한다. 반면 이 C씨는 동생에게 형 말은 들어야 되는 거라고 설파하며 자기 잔심부름을 전부 시키고, 말 안 들으면 때리고, 대학시절 학교에서 총학생회장을 뽑을 적에는 술사준 선배의 충고에 따라 뽑았고, 앞으로 있을 총선이나 대선에서도 그런 식으로 표를 행사한다.
올바른 공교육이 어때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D씨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노동3권 및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 학생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근현대사의 굴곡에 대해서나 정치권력에 대한 경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며 단순암기식 수업을 넘어선 철학적 사고력의 중요성에 관심이 많다. 매너리즘에 빠진 다른 교사들에 대해 실망하며 좀더 나은 교육을 고민하는 진보적 교사이다. 반면 자신의 자식은 그래도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을 나와 정장을 입고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바로 이런 바램이 학부모들 사이에 만연해 공교육을 흔드는 주된 요인이 되며, 노동자의 지위를 더 낮추는 관념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
사회비판적인 블로그 포스트를 볼 때마다 맞다고 맞장구치고 트랙백도 걸고 그 논리를 재삼 설파하기도 하는 E씨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주장들이 서로 모순으로 상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고3 수험생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극악한 경쟁관계의 교실풍경을 조장하는 내신강화정책이 나쁘다는 주장에 한껏 동조해 자신도 그렇게 설파해놓고도, 공교육을 살리고 사교육을 줄여야 하며, 어린 학생들을 입시지옥에 빠지지 않게 해야 된다고도 주장한다. (←내신강화가 바로 이 역할을 한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제 몫을 못받는다며 평준화를 반대해놓고 중학교 공교육을 입시로부터 구해낸 것이 바로 그 평준화라는 것을 모른다든가. 뭔가 ‘좋아보이는’ 주장, 뭔가 ‘나빠보이는’ 사회제도 비판을 겉만 답습하고 그 내부의 과정을 추적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방향성 없는 비판만의 비판을 매번 반복하고 있다.
사회비판적인 글을 찾아읽고 공감하며 자신의 인식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F씨는 이 나라의 언론이 정말 문제라는 포스트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언론권력을 비판한다. 그러나 자신은 넷상에 올라온 일반 시민들을 조롱하는 ucc나 짤방 등을 찾아다니고 보고 폭소하며 그들의 신상정보가 돌아다니는 걸 확인하고, 자신을 괴롭힌 사람은 단박에 신상정보를 공개해버리면 DC가 알아서 해준다고 대놓고 말한다. 맘에 들지 않는 사회제도나 마음에 들지 않는 회사의 서비스 등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고 개선을 요구하지만,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다 이렇게 사는 거지' 라고 답한다. F씨 처럼 사회적 틀에서의 개선과 개인차원에서의 실천이 전혀 닿아있지 않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런 식이다. 한 사람이 한 분야에서 부당함을 느껴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며 좀 더 바람직한 무언가를 주장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지만, 바로 다음 분야에서 나몰라라 하고 기득권을 누리거나 아무 생각없이 잘못된 관습을 따르고 있다.
사회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이 100명 있다면, 그 중 일부는 F씨처럼 실천적 차원에서는 유리된 생활을 할테고, 일부는 E씨처럼 구체적인 과정상의 문제를 탐구하지 않고 겉표면만을 비판하고 있을테고, 일부는 D씨처럼 사회에 대해서는 올바른 주장을 하면서 자기 개인사적 이익에 대해서는 포기할 수 없을테고, 일부는 A, B, C씨처럼 한 영역에서는 더없이 진보적인데 다른 영역에서는 더없이 기득권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일부만이, 사회적-개인적 차원 모두에서, 주장의 겉표면만이 아닌 깊숙한 부분까지, 또 한 영역만이 아닌 다른 영역에까지, 그 사고를 일관성있게 구축하고 또 재구축하며 사회를 개선하려 노력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1%는 커녕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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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발전과 개선, 진전은 이런 1%도 안 되는 일관성있는 비판자들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이고 남존여비를 믿은 사람들도 독립운동을 했고, 또한 여자를 성적으로 이용해 먹던 사람도 학생운동을 잘 하기도 했다. 집안에서 아내와 자식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가장의 말만 받들게 하면서 가열찬 언론비판운동에 뛰어들어 아주 현명한 주장을 하고 큰 기여를 하던 사람도 봤다. 사회복지단체에서 봉사적으로 활동하면서 자기가 직업상 맡은 임무는 다 펑크내는 사람도 봤다. 그러나 이 사람 때문에 그 사회복지단체는 활기를 찾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반쪽짜리 활동가도 사회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런 반쪽 비판자라도 늘어날수록 좋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자신이 그런 반쪽짜리 비판자가 아닌지, 다른 영역에서의 악습옹호자가 아닌지 각자가 스스로 반성해보면 좋겠다. 반쪽짜리가 아닌, 일관성있고 실천적 차원에서의 비판자가 늘어날수록, 사회의 개혁도 조금이라도 더 잘 풀릴테니까. 왜 비판자는 많은데 개선은 그렇게 빨리 되지 못하는가, 그 안타까운 괴리도 조금은 줄일 수 있을테고.
# by | 2007/07/11 14:24 | How to Live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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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놀도야지님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ynic님 // 이중성을 깨뜨린다 ㅡ 라고 추상적으로 말하면 대단히 어려워 보이지만, 개개의 사안에서 조금만 더 성실해져도 많이 개선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